열혈명호

fireflag.egloos.com

포토로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인연의 순간 -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 熱血讀書記열혈독서기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 8점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이덴슬리벨

" 혹시 새로운 누군가에게 눈을 뜨거나 마음이 끌릴 때,

갑자기 어디를 가건 그 사람 이름이 튀어나오는 걸 알아챈 적이 있나요?

내 친구 소피는 그것을 우연이라고 부르고 나와 친한 심플리스 목사님은 은총이라 하십니다.

목사님의 설명을 빌리자면 새로운 사람이나 사물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면 일종의 에너지를 세상에 내뿜고,

그것이 '풍부한 결실' 을 끌어당긴다고 해요."

p. 180

 

 

제 2차 세계대전이 유럽을 화마로 휩쓸고 간 직후.

경쾌하고 유머러스한 필치의 전쟁 칼럼으로 런던의 독자들을 사로았던 줄리엣 매커너는 우연히 편지 한 통을 받게 된다.

잉글랜드에 속한 '채널제도' 의 '건지'라는 이름을 가진 섬에서 온 편지였다.

 

자신을 '도시' 라고 밝힌 편지속의 남자는 우연하게도 줄리엣이 헌책방에 팔았던 책을 손에 넣게 되어서 편지까지 쓸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이런 우연을 시작으로 줄리엣은 도시와 편지를 주고받게 되고, 건지섬의 문학회에 대해 알게 된다.

마침 전쟁에 대한 새로운 칼럼을 제안받은 줄리엣은 건지섬의 문학회를 소재로 삼기로 하고, 건지섬의 문학회원들 역시 그녀의 생각에 동참하고 도와주게 된다. 물론, 편지로.

 

건지섬의 문학회,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의 회원들 한명 한명들과 편지를 주고받게 된 줄리엣.

독일군의 지배를 받았던 건지섬의 순박한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일들을 겪었을까?

그리고, 줄리엣과 어떤 관계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까?

 

 

 

'인연' 이란 대부분 '우연' 에서 시작된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제어할 수 없는 특수한 무언가. 불교에서 인연은 전생들을 통해 쌓아온 많은 것들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그렇듯,  '우연' 이라고 말하기엔 조금 억울할 정도로 특별한 순간을 통해 사람은 사람을 만나고, 인연은 시작된다.

이 작품속에 등장하는 줄리엣과 도시 역시 기적에 가까운 우연을 통해 첫 편지를 나누게 된다.

만약, 인연을 관장하는 신이 정말 존재한다면, 신의 손길은 딱 거기까지였다.

줄리엣이 헌책방에 팔았던 책을, 건지섬의 도시의 손에 닿게 해준 것.

도시는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용기를 내어 펜을 들었고, 그 편지는 무사히 바다를 건너, 우체부의 손에 들려, 무사히 줄리엣의 손에 닿았다. 그래, 어쩌면 거기까지도 신의 손길이 미쳤을지도 모르겠다. 우편 수송선이 바다에 가라앉았을 수도 있고, 우체부가 실수로 도시의 편지를 줄리엣에게 전해주지 못했을 수도 있고, 줄리엣이 너무 바빠서 도시의 편지를 미처 읽지도 못했을수도 있으니까.

 

여하튼, 약간의 사람의 힘과, 신의 손길과도 같은 절묘한 타이밍을 통해 도시와 줄리엣은 처음으로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또한 절묘한 타이밍으로, 줄리엣에게 새로운 원고 청탁이 들어왔고, 도시의 편지 역시 그 때 도착하였고, 줄리엣은 그 내용을 통해 청탁받은 원고의 소재를 찾아내게 된다.

만약 줄리엣이 청탁받은 원고의 내용이 전쟁이 아니라 패션이나 문화였다면, 도시의 편지는 그냥 그렇게 묻혀졌을지도 모른다.

 

이 작품 속에는 이렇게 디테일한 관계설정의 과정이 여성 특유의 세밀함으로 부드럽게 펼쳐져 나간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묘사 역시 대단히 디테일해서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굉장히 리얼하다.

정말 등장인물들이 실존하는 것 같고, 편지도 실제로 주고받은 것 같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정도이다.

 

작가 역시 철저하게 인물간의 관계에만 집중해서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불필요한 군더더기도 별로 없다.

소소하고 아기자기한 일상들이 특유의 유쾌함과 경쾌함으로 끊임없이 즐거움을 주고, 몰입감을 더한다.  

 

 

 

사람은 끊임없이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언제나 '타인' 을 갈망한다. 타인에 대해 큰 상처를 입고, 그 배신감에 치를 떨어본 사람도 결국은 다시 타인을 갈구한다.

그래. 그것이 사람이 태생적으로 외롭다는 증거이리라.

만약 사람이 외롭지 않은 존재라면 그렇게까지 타인을 갈망할 리 없으니까.

사람을 죽이는 가장 무서운 무언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난 '외로움' 을 꼽겠다.

사람은 지켜야 할 '타인' 이 있을때 진정한 힘을 발휘한다.

치명적인 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사는 두 사람이 있다고 해도, 자기 자신만큼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은 보다 치열하게 남은 삶을 살아가고 때론 그 치명적인 암도 이겨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런 '타인' 이 없이 홀로 외롭게 투병하는 사람은 보다 일찍 삶을 포기할 것이다.

 

모든 사람은 외롭고 고독한 것이 맞다.

하지만, 바로 그렇게 때문에, 사람들은 서로를 찾고 사랑을 찾는다.

만약 사람이 외롭지도 않고, 고독하지도 않다면, 그냥 혼자 살면 될테니까.

누구에게나 마음 붙일곳이 필요하고, 그 마음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타인' 이다.

그 타인이 어쩌면 지금까지 내가 가장 미워하던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내가 가장 불신하던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인연' 이란. 사람사이의 '타이밍' 이란 누구에게나 어떻게든 찾아올 수 있기때문이다.

 

결국 이 세상의 모든 '타인' 은 나의 '인연' 이 될 확률은 모두 동등하다. 

 

줄리엣과 도시가 그렇게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런던의 잘나가던 프리라이터와, 영국 끄트머리 외딴 섬의 돼지치는 농부가 말이다!

 

 

 

ps. 개인적으로는 마지막 편지 한장이 조금 사족같이 느껴진다.

'미스 이솔라 프리비의 탐정수첩' 에서 끝났어도 좋았을 걸.

 

http://fireflag.egloos.com2010-06-22T04:54:540.3810

덧글

댓글 입력 영역